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표트르 1세 (문단 편집) ====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 1703년 스웨덴령 잉에르만란드를 점령한 표트르 1세는 새로운 수도를 만들기로 결정하고 [[발트해]] 연안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네바강]] 하구 [[삼각주]]에 있는 섬에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를 지었고, 그 도시의 이름을 '[[성 베드로]]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지었다. 1712년 이 도시는 결국 완공되어 [[러시아 제국]]의 새로운 수도가 되었는데, 이 도시가 바로 오늘날의 상트페테르부르크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후 러시아의 귀족들과 백성들을 강제로 여기에다 이주시켰다. 그러나 [[늪지대]] 위에 도시를 만드는 일이라 많은 사람들이 [[폐렴]]과 [[결핵]] 등 [[전염병]]으로 죽었다. 혹자는 이를 두고 '뼈 위에 세운 도시'라고 평했다. 다만 '뼈 위에 세운 도시'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애시당초 '뼈 위에 세운 도시'가 진실이면 땅을 파서 뼈를 찾는 것으로 간단하게 증명 가능한데, [[소련]] 시대에 표트르 1세 격하를 목적으로 발굴 탐사가 이루어졌지만 증거가 없었다. 무엇보다 극초기 1년의 동원이나 전쟁포로들을 제외하면 임금도 주고, 1~3달 주기로 교대로 시켰고, 전염병 돌면 최소한의 의약품도 지급해주거나[* 물론 전근대의 열악한 의학수준을 감안하면 의약품을 지급해도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공사에서 면제시켜줬다.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는 당대의 기록과 증언이 있고 초기 역사가들은 이것을 그대로 차용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공식적인 기록이나 구체적인 수치자료는 없다. 단순히 모호하게 많이 죽었다는 증언을 제외하고 수치를 제시한 걸 보면 당시 러시아를 여행한 영국 귀족 [[https://en.wikipedia.org/wiki/Francis_Dashwood,_11th_Baron_le_Despencer|프랜시스 대쉬우드]]는 공사 초기에만 30만명이 죽었다고 러시아인들로부터 들었다고 기록했고 이런 식의 기록들을 하나하나 찾아보면 10만~100만 정도로 나오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수치다. 정말 수백, 수십만의 인력을 동원할 능력이 있고 그만한 손실이 나도 끄떡없다면 애시당초 러시아가 스웨덴, 오스만을 가볍게 즈려밟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러시아 내부의 공식 보고서로 1712년에 2,210명의 기술자 중에서 365명이 도망갔고 61명 사망했다, 1717년에 32,000명의 노동자들 중에서 1,000명이 전염병에 걸렸다는 식의 단편적인 공식 수치는 해당 내용과는 오히려 상반되는 내용이다. 어쨌든 정확히 얼마나 동원되고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는게 정설이다. 그러나 수십만이 죽었다는 건 너무 비현실적이고 정황 증거상 최대치를 잡아도 동원자 수는 대략 30만[* 한꺼번에 30만명을 동원 했다는게 아니라 주기적으로 동원 소집과 해제를 반복한 것의 총 누적 수치다. 반복적인 소집과 해제 사이에서 분명히 중복되는 인원들이 상당수 있었기에 말 그대로 최대치고 실제로는 훨씬 적었다고 봐야한다.], 사망자 수는 수만 정도인 것으로 예측된다. 전근대의 대규모 공사이니만큼 분명 많은 사람이 죽었긴 하겠지만, 정 반대로 그 전근대 대규모 공사의 평균치를 넘어서는 건 아니었다는 소리. 엄밀히 도시를 세우려던게 아니라 적의 영토를 점령하고 최전선에서 방어거점을 구축하는 거였기에 순수하게 건설보다는 전투나 [[비전투손실]] 등의 여러 요인들이 복잡하게 작용했다보니 애매한 면이 있다. 물론 '뼈 위에 세운 도시'라는게 구체적인 수치를 드러내지 않는 문학적 표현이기에 큰 상관은 없긴 하다. 표트르 1세의 서구화 개혁 의지가 드러나는 것은 바로 도시의 이름 그 자체인데,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어]]가 아니다. 러시아어로는 "페트로그라드"[* 여담으로 페트로그라드라는 이름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과 사이가 안 좋아졌을 때 본래 이름 대신 사용되었던 이름이기도 하다. 이후 [[소련]] 시절 내내 [[블라디미르 레닌]]의 이름을 따다 붙인 [[레닌그라드]]로 불리다가 [[소련 해체]] 후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환원되었다.]가 되어야 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스웨덴어]] '상트(Санкт/Sankt)'와 독일어 '페테르부르크(Петербург/Petersburg)'가 합쳐진 이름으로 당시에 [[독일어권]]이 선진화된 지역이라고 생각했기에 자신이 새로 짓는 수도 이름에 외국어 발음을 붙였다. [[러시아 과학원]] 역사연구소측 연구원(대국굴기, 강대국의 조건 러시아편. p40)에 의하면 초기엔 [[우크라이나]]의 [[오데사]] 부근에 건설할 것이 검토되기도 했지만 오스만 제국, [[크림 타타르]]족의 저지로 인해 최종적으로 오늘날 위치에 건설하기로 정해졌다고 한다.[* 어차피 오데사가 러시아 제국 영토가 된 것은 1792년 [[이아시]] 조약 이후이다. 그 전까지 오데사는 오스만 제국 [[실리스트라|실리스트레]] 에야레트(Eyālet-i Silistre)에 속했다.] 이 점을 밝히며 표트르 1세가 꿈꾸던 [[발트함대|발트해 해군]]은 안타깝지만 힘을 제대로 쓰지 못했고, 러시아의 수도도 결국 모스크바로 다시 옮겨졌다고 표트르의 발트해 해군의 꿈은 실패했다고 평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